봄날 오후 찾은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선착장은 한적하고 평화로웠다. 석모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석모도로 들어가려는 차량과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어선 몇 척과 과자를 기다리는 갈매기들, 젓갈과 회를 파는 어시장 상인들의 목소리만 바다 위로 둥둥 떠다닐 뿐이다. 포구 한 켠에는 하르방과 진돗개 동상이 서 있다. '삼별초군호국항몽유적비'란 바위도 눈에 들어온다. 748년 전, 이 자리에서 삼별초군이 떠났다는 스토리텔링을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반몽파인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린 건 친몽파 무신들이었다. 김준 등은 60년간 이어진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수장 최의를 죽이고 몽골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추진한다. 1259년 4월 고려의 태자 식(植)이 40여명의 신하들과 함께 몽골에 입조한다. 이 무렵 고종이 승하하면서 태자 식이 귀국해 24대 원종에 오른다. 이후 무신 세력 간에 환도 찬반문제를 놓고 친몽파와 반몽파 간 또다시 세력다툼이 벌어지면서 죽고 죽이는 상황이 이어진다.
결국 무신 임유무와 문신 송송례, 홍문계의 싸움에서 임유무가 죽으면서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시대는 막을 내린다. 1270년 고려 정부는 마침내 개경환도를 단행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개경환도에 불만을 품은 최정예부대 삼별초가 깃발을 높이 올리고 몽골에 맞서 '최후의 순간까지 항전'을 결의한 것이다.
삼별초의 수장 배중손은 개경환도와 함께 삼별초 해체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고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세운다. "개경환도를 단행한 고려정부는 진정한 고려인들이 아니다. 고려의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으며 고려의 국왕은 승화후 온님이시다. 자 모두 나를 따르라."
1270년 6월3일. 배중손은 그렇게 삼별초군이 탄 1000여척의 배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한다. 삼별초는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의 3개 특수부대를 가리킨다. 강화로 천도하기 전 최우는 야별초를 조직한다. 공병이면서 자신이 사병처럼 부릴 수 있는 호위부대였다. 강화 천도 뒤 야별초는 그 역할이 훨씬 강화됐으며, 1253년엔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어진다. 몽골과의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가 탈출한 사람들로 만든 신의군까지 만들어지면서 삼별초가 완성된다. 이들은 무신정권의 녹을 먹으며 몽골과의 항전에서 최전방에 섰던 군인들이다.
개경환도를 단행한 원종은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와 사돈을 맺은 '친몽파'였다. 원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개경환도를 추진했으나 임연, 임유무 등 무신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던 터였다. 10년 만에 임유무를 제거한 원종이 무신정권의 탄탄한 기반인 삼별초의 해산을 명한 것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위기에 몰린 삼별초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결사항전' 뿐이었다.
배중손을 필두로 삼별초가 처음 닿은 땅은 전남 진도였다. 두 달 간 망망대해를 항해한 삼별초는 진도 용장사에 진지를 구축하고 둘레 13㎞의 용장산성을 쌓는다. 성안엔 궁궐과 관아건물을 지어 전시수도의 모습을 갖추고 몽골의 침략에 대비한다. 삼별초는 진도를 거점으로 전주 등 전라 일대와 경상 남부지역을 장악하는 한편, 일본과의 연합을 꾀한다. 삼별초는 한때 바다를 장악, 남부 연안지역에서 개경을 잇는 교통로를 마비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1271년 5월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며 진도는 함락되고 배중손도 전사한다.
삼별초는 다시 탐라(제주)로 거점을 옮겨 항파두리에 진지를 구축한 뒤 항전을 계속한다. 제주에서의 항전은 그러나 2년을 넘기지 못한다. 1273년 1만2000여 여몽연합군의 공격을 받으며 진압된 것이다.
역사는 삼별초의 존재를 여기서 지워버린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시간 이후 삼별초의 흔적이 일본 오키나와에서 발견되면서 학계를 긴장시켰다. 오키나와 우라소에조(浦添城)에서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란 명문이 박힌 기와가 1982년 우라소에 성에서 출토된 것이다. 계유년은 삼별초가 제주에서 완전히 진압된 1273년인 것이다. 이때문에 제주에서 패한 삼별초군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 오키나와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추정되고 있다.
삼별초의 봉기는 고려정부의 입장으로 볼 때 반란행위였다. 그러나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골과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려던 국왕과 그 일파에 항거한 고려인들의 강인한 자주의식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생존을 위해 항쟁을 선택했지만 그들의 가슴엔 항몽사상이 뿌리깊게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강화천도 때부터 몽골과의 전투 최전선에 있었으므로 몽골에겐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 고려사>는 삼별초가 강화도 서북해안을 통해 남하했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 정확한 포구는 찾아볼 수 없다. 현재까지 삼별초가 떠난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외포리이지만 삼별초가 떠난 자리를 지금의 선두2리 마을회관 뒤쪽 바다였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현재 이 곳은 동주농장이 매립해 농지로 사용하고 있으나 수십년 전 만해도 '뱃마당'이라는 작지 않은 항이 있었다.
심상점 선두2리 이장은 "3, 40년 전 만해도 뱃마당엔 객선과 중선 등이 드나들었다"며 "오래전부터 삼별초의 출항지였다는 얘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문에 삼별초가 출항한 포구가 정확히 강화도 어디였는가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아울러 삼별초와 오키나와의 관계에 관한 연구도 필요하다.
/글·사진 김진국 논설위원 freebird@incheonilbo.com
'고려건국 1100주년, 고려를 다시 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쇄술의 성지 강화도 (0) | 2018.04.23 |
|---|---|
| 6.강도시기의 고려유물(상) (0) | 2018.04.19 |
| 5. 고려 수도 '江都'의 시대 (0) | 2018.04.02 |
| 진짜 고려궁지는 어디일까? (0) | 2018.04.02 |
| 고려왕조 VS 몽골제국 (0) | 2018.03.26 |